■■ 명상의 씨- 토마스 머튼
오늘의 지평
왜 그리스도인인가? 사람이면, 참으로 사람이면 그만이지 어째서 또 그리스도인이라야 하는가?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보다 큰가? - 한스 큉
瞑想의 씨
땅 위에 사는 사람 사람의 순간 순간, 사사건건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을 심는다.
바람이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수많은 솜털 달린 씨들을 옮겨가듯이, 시간의 흐름은 남몰래 사람의 정신과
의지에 파고드는 靈神 생명의 씨를 가져온다.
... 이런 씨는 자유와 열망의 기름진 땅이 아니면 싹틀 수가 없다.
모든 쾌락의 獄囚가 되어 버린 정신, 모든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의지는 보다 고상한 희열,
초자연적인 열망의 씨를 받아 심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힘쓸 바는 쾌락이나 성공,
생명이나 건강,
돈이나 휴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고통이나 실패, 죽음 병 따위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내 오직 하나의 열망, 하나의 기쁨은 이를 아는 것이니
곧, “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것을 원하신다.
나는 여기서 임의 사랑을 발견하고,
이 뜻을 받아들임으로써만
나를 임께 드리고 당신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임이 뜻하신 바 명상의 단계에까지 자라나니,
이 곧 다름 아닌 영생이다.”
만물은 신성하다.
성인의 눈은 모든 아름다움을 거룩케 하며,
그 손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성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노하지 아니하고,
또한 죄를 모르기 때문에 남의 죄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성인이 아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뿐이며,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음은 오직 이를 만인에게 베풀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합일되어 있으면
우리는 임 안에 모든 것을 소유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합일되어 있으면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임께 바쳐 드린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우리 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또한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발견하는 충족은 被造物의 實在에 속하는 것-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을 반영한다.
그 안에 있는 고민은 우리 욕망의 무질서에 속하는 것-
우리 욕망이 그 대상에서 항상 실제로 있는 것보다 더 큰 실재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욕망은 언제나 어떤 피조물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충족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항상 피조물을 이용하여 우리 스스로를 섬기려한다.
자기가 되어야만
내가 성인이 되는 길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내 성덕이나 구원의 문제는, 곧 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참된 나를 찾느냐 못 찾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환상적인 인격, 즉 거짓 나로 그늘져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만,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조금도 아시는 바 없으므로,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내가되는 비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속에 파묻혀 있다.
내가 내가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내 존재 이유와 내 존재의 충족이 파묻혀 있는 임과 같아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 전존재와 평화와 행복이 달려 있는 문제는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나를 발 견하는 것 하나뿐이다.
나 만일 임을 찾기만 하면 나를 또한 찾을 것이요, 참된 나를 찾기만 하면 임을 찾게 될 것이다.
나를 가르쳐 임을 찾을 수 있게 하실 이는 홀로 내 임, 내 하느님뿐이다.
기도로 자기를 발견하라
그러므로 하느님을 완전히 찾는다함은,
곧 환상과 쾌락,
세속적 근심과 욕망,
하느님 원치 않으시는 일과 사람만을 자랑하는 영광에서 퇴각하는 것,
내 자유가 임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정신의 분산을 극복하는 것,
내 마음의 침묵을 즐기고,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피조물의 개념과 영상에서 우리 지능을 해방시켜,
신앙으로 은밀히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
겸손에 머무르고,
남과의 투쟁과 경쟁에서 물러나와 평화를 발견하는 것,
쟁의를 피하고,
판단과 비평의 짐을 벗어버리고,
말할 의무가 없는 참견을 삼가는 것,
내 의지를 꺾고,
영혼의 힘을 기울여,
내 안에 깊이 들어가 조용히 하느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
내가 임께 매달려 있는 점에다 조용히 하느님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
내 전부,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당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와,
맹목적 신앙과, 완전한 사랑으로 모두 임의 뜻에 바쳐드리는 것.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비워 놓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
“ 가만히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림이 좋으니 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다.
내가 되려면, 지금까지 되려고 생각해 온 것을 단념해야 한다. 참된 나를 발견하려면
나를 떠나야 한다. 살고 싶으면 떠나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이기심 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보다 참되고 내가 되려는 자연적 노력은 도리어 거짓되고,
나와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이는 내 노력이 거짓을 감싸고돌기 때문이다.
나를 찾되, 하느님 안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서도 나의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대가 일부러 고독의 생활을 택한다면, 이것이 그대가 하느님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그대의 입장을 정당화 할 수 있다.
그대는 광야로 가되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 위하여 하지 말고, 하느님한테서 그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라.
내적 고독이 없으면 참 고독은 없다.
다른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적 고독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재능이나 덕행이 뛰어나고 많은 은총을 받아서 이것이 남과 분리시켜 그들 위에 놓이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다.
가장 큰 자유는 겸손에 있다. 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두둔하는 한,
그대는 마음의 평화를 잃을 것이다. 그대가 그림자를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와 비교하기만 하기 시작했을 뿐더러,
존재치 않는 것에는 기쁨이란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대는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하여 남의 행동에서 죄와 허물을 낱낱이 캐내기
시작할 것이다. 완전한 기쁨은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욕을 다 버리고, 별안간 잠을 깨어보면 하느님의 기쁨이 사방에 있음 을 보게 될 것이다.
자기네의 덕과 선으로 일찍이 맛보지 못한 기쁨을 다른 사람의 덕과 선에서 발견하고 용약할 것이다.
그는 같이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느님을 반영하는 황홀한 빛에 어리둥절하여,
이웃에서 보는 어떠한 허물이라도 단죄함을 잃고 만다.
그들은 가장 큰 죄인한테서도 남이 찿아낼 수 없는 덕과 선을 본다.
그들로 말하면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 들지 않는다.
비교란 이제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마침내 자기네가 보잘것없음을 의당히 여기고 자신에 대하여 조금도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있는 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의 模像대로 만들어졌다 함은, 사랑은 내 존재 이유라 함과 같으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참 나다. 사랑은 나의 참 성격이다. 사랑은 내 이름이다.
내 욕심을 차리지 않는 것이 참 나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느님의 본질인 聖所, 사랑이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쫒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기꺼이 버리는 길밖에 없다.
고독
우리가 고독을 찾는 것은,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광야로 가는 것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참 고독은 그대 밖에 있는 무엇도 아니요, 그대 주위에 사람이나 소리가 없음도 아니요,
다만 그대의 영혼 가운데 열려 있는 심연이다.
이 내적 고독의 심연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만족될 수 없는 굶주림으로 조성된다.
고독을 찾는 단 하나의 길은 굶주림이요, 목마름이요, 슬픔이요, 가난이요, 열망이다.
고독을 찾은 사람은 마치 죽음이 휩쓴 공허와 같이 텅 비어 있다.
성실
겸손은 단순히 겉모양이나 의견, 취미, 행동하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 속 에 있는 무엇이다.
그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익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성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자기를 망칠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은 깊은 정신적 세련과 평화스러운 마음, 그리고 건전한 윤리의 터전이 되는 묘기와 상식을 동반한다.
가장 큰 겸손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고심에서 습득할 수 있다.
곧 그대가 되려고 계속 노력을 하되 함부로 날뛰지 말고 다른 사람의 거짓인격을 거슬러
그대의 거짓인격을 내세우지 않음이다.
성인의 첫째 표지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옳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가 미친 것인지 교만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시인은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명상가는 창조되기 위하여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
해처럼 빼어나신
그분의 성덕이 대단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만일 그분이 감추어진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다면
그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분과 같이 겸손하고 감추어지고 가난하고 숨어 있고 고독하게 사는 것이 그분을 알기에 가장 좋은 길이다.
그분의 성덕은 침묵이다. 이 침묵에서만 그리스도를 들을 수 있고, 마리아의 명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체험으로 나타난다.
지금 살아야 하는 세상에 살면서 누가 갑자기 세상에 열중하는 흥미를 잃어버리고,
자기 영혼 속에 꿈틀거리는 가난과 고독에의 요구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놀라운 은혜요 커다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이나 초자연의 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 감추이기를 원하 는 것,
세상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自意識的 생각을 벗어버리고
그지없는 가난으로 無로 화해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는 곧 다름 아닌 하느님의 崇敬 이다.
이 절대적 空虛, 이 가난, 이 어둠은 하느님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기쁨의 비결을 지니고 있다.
이 空虛를 찾는 것이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참된 효성이다.
이를 찾으면 곧 어머니를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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